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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 나의 우리건축 이야기

김상태 교수의 우리건축 제대로 알기 01

등록일 2021년02월15일 07시54분 URL복사 기사스크랩 프린트하기 이메일문의 쪽지신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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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 나의 우리건축 이야기

김상태 교수의 우리건축 제대로 알기 01

Prof. Kim snag-tae’s Learn our right architecture,

‘My and our story of architecture’

 

 

우리건축

수천 년 이 땅에 사람이 살기 시작하면서 이 땅에 지어져 온 건축을 필자는 우리건축이라고 말한다.

현재 한옥, 전통건축이라고도 말하는 우리건축은 불과 20~30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 주위에서 흔히 찾아 볼 수 있었으며, 시골에 가면 대부분의 주택이 한옥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너무나 빠른 시간 동안 대부분의 우리건축은 사라지고 말다. 그리고 그 자리는 콘크리트와 철골로 이루어진 아파트와 빌딩으로 대체되었다.

2천년 이상 이 땅에 주인공으로 당당히 자리매김했던 우리건축은 일제강점기를 포함한 근대기를 거치면서, 남북의 전쟁, 혁명, 급격한 현대화 등 지나치게 급변하는 현대사를 통해 옛 것은 그저 불편하고 버려야 하는 전근대적 후진 문화로 치부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불과 길게는 100여년, 짧게는 20~30년이라는 기간이 지나면서 서양, 혹은 일본으로부터 유입된 변화된 문화의 건축이 우리건축을 대신하여 그 주인자리를 행세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림1. 안동하회마을.

고려말기에 조성된 양반마을로 우리건축의 전통과 문화를 고스란히 보전하여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80~90년대 우리의 건축교육은 우리 건축을 한국건축사라고 하는 전공 영역에 포함하여 일반적인 건축 영역과 다른 매우 특수한 영역으로 간주되어 교육되었으며, 많은 연구자들 또한 한국건축사 전공자들을 그들만이 할 수 있는, 또 그들만이 해야만 하는 연구 분야라고 여기었다. 그래서 현재 소위 흙과 나무로 이루어진 옛 건축을 말하는 우리건축과 콘크리트와 철골, 벽돌과 유리로 이루어진 현대건축의 이분법적 분류를 통한 현재의 분류체계에 문제를 제기하고 싶다.

 

우리건축 접하기

대학 1학년 우리건축을 알기위해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경기도, 충청남도, 전라북도, 전라남도, 경상남도, 경상북도를 도는 전국 답사를 하였다. 당시 건축학개론과 미술실기만을 배웠던 필자는 지붕이 기와와 이엉(짚이나 새로 역어 이어 만든)으로 이루어졌고, 벽은 흙과 나무로 된 집이 우리건축이며, 앞으로 우리가 설계하고 지어야 하며, 발전시켜야 하는 당연히 기본이 되어야 하는 건축이라 생각하였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현대건축과 함께 우리건축 또한 더불어 설계해야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러한 우리건축에 대한 사고의 중심은 고등학생까지 서울 광화문의 도시형 한옥에 살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비록 재개발로 인해 주상복합으로 변하기는 했지만, 내가 태어난 서울 한복판의 주택은 대부분이 한옥이었으며, 부모님의 고향인 충남 홍성에 가면 한옥은 언제나 친근하고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건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건축에 대한 생각은 1학년 2학기부터 완전히 바뀌었다. 건축제도 수업과 4학년 선배의 졸업 작품을 도우면서 본 작품들에는 한옥건축인 우리건축의 모습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학부시절 전통건축에 관련된 과목이란 교양수업인 민가론과 3학년 전공수업인 한국건축사외에는 전무했다. 아마 이 칼럼을 읽고 있는 건축가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나마 나의 모교는 매우 이른 시기에 한국건축사가 개설되었으며 많은 선배님들이 한국건축사를 전공하고 있었기에, 한국건축에 대한 접근과 관심이 쉽게 갈 수 있었다. 학부시절 전통건축에 대한 관심은 졸업작품을 통해 적용시키려 하였다. 주제를 실버타운으로 하면서 그 컨셉을 노자 도덕경의 중심사상인 자연관으로 하였다. 형태는 현대건축이면서 그 공간 개념을 전통개념을 도입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우리건축에 대한 나의 건축세계는 대형건설회사의 취업과 설계사무소의 생활을 통해 점차 거리가 생기게 되었다.

 

대학원 시절이었다. 석사 과정에 입학하면서 현대건축의 설계 및 계획을 전공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행정조교를 맡게 되면서 건축사연구실의 경북답사를 함께하는 계기가 있었다. 그 답사는 한국건축을 전공하신 교수님과 그 연구실 제자들이 주축이 된 답사였다. 나만 홀로 다른 연구실의 연구생이었다. 그리고 그 답사가 내 인생의 변환점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다. 대부분 대학교수와 박사과정으로 이루어진 건축사 연구실의 연구원들의 심도있는 토론은 이것이 바로 우리건축에 대한 고심이며, 진정한 우리의 건축이 나아가야 할, 그리고 연구해야할 건축이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 날 이후 건축사연구실의 연구생이 되었으며, 그 날 같이 토론하였던 교수님과 연구원들은 지도교수님과 연구실 선배님들이 되었다.

 

대학원의 수업은 한국건축사 전공이기에 전공과 관련된 연구와 수업을 병행함과 동시에 설계, 현대건축론, 근대건축론, 환경계획 등 소위 현대건축 전공영역에 해당되는 과목을 수강하였다. 이는 건축사연구실의 다른 연구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시기, 현대건축과 설계를 전공하는 대학원생들이 한국건축사 관련 수업을 들으면서 항상 하는 말이 있었다. “나는 현대건축을 전공하기 때문에 한국건축사는 어려워요. 이해해주세요.”라고. 이 말에서 한국건축사를 근본으로 하는 전통건축과 현대건축을 구별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삼하리주택 - 사진 에이앤뉴스 D.S Yoo 

그림3. 삼하리주택 도면(설계 류춘수).

삼하리주택은 전통주택의 평면구성과 형태를 응용하여 현대건축에 적용 계획한 대표적인 작품이다.

대학원시절 필자는 현대건축과 전통성에 관한 연구를 삼하리주택의 예를 통해 분석하였다. 

 

그림4. 하회 충효당 도면.

서애 류성룡의 생가였던 충효당은 16세기 이후 양반주택의 모범이 되었으며, 현대주택의 전통성 구현에 대표적인 사례가 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서양건축사와 관련된 수업의 경우 한국건축사에 이질적인 반응을 하였던 연구자들이 자신들과 관련된 과목이라고 전자와 같은 ‘어렵다’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건축사와 서양건축사는 건축역사라는 같은 연구체계를 가지고 있는 분야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살고, 한국에서 학교를 다녔으며, 한국에서 건축설계 등 관련 전공을 하면서도 서양건축사는 이질적이지 않으면서 한국건축사는 이질적이다 라는 말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 수천 년을 내려왔으며, 자신들의 부모와 가족이 살았던 자신들의 삶과 문화가 닮긴 자신들의 건축을 이토록 무시하는 나라가 있을까? 항상 내 머리에 떠나지 않았던 이 기억은 전통건축, 즉 우리건축을 전공하고, 우리건축을 이어가고자 하는 젊은 학생들의 길을 인도하는 선생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우리건축에 대한 오해?

박사과정이었던 1998년부터 한국건축사를 강의하면서, 세미나를 발표하면서, 그리고 답사를 하면서 많은 학생들과 비전공자이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일이 일어나곤 하였다. 전에 자신들이 생각하고 알았던 우리건축에 대한 생각과 모습이 너무 다르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특히 많은 학생들이 크게 반응 했던 대표적인 내용 2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어려서부터 전설의 고향을 시청하기를 즐겨 했던 우리세대는 언제나 산속에서 길을 잃은 남자들이 등장하는 장면을 자주 보곤 하였다. 길을 찾다 밤이 되고 너무 피곤한 나머지 탈진한 주인공은 저 멀리 초가집의 창문에 어여쁜 아낙이 바느질이나 다듬이질을 하는 모습을 보고 허겁지겁 달려가곤 한다. 아낙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구미호나 지네, 혹은 착한 선녀이기도 하였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초가집’이다. 드라마에서는 창호지로 된 살창으로 빛이 새어나와 사람들의 등대기능을 하였던 그 창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 장면은 거의 재현되기 어려운 장면이다. 왜냐하면 산속의 화전민들이 주로 사는 초가집 혹은 너와집 등의 창문은 창호지로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평지나 책을 만들기도 어려웠던 고가의 창호지를, 그것도 양반집이 아닌 최빈곤층의 집에 사용했을 리 만무한 것이기 때문이다. 창호의 재료를 대부분 소나무 통나무를 널빤지로 만들어 빛이 새어나오지 않게 하였는데, 이는 실내에 조명을 호롱불로 했기 때문에 빛이 새어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고로 조선시대 상류층의 집과는 다르게 하층민의 집에서는 밤의 경우 거의 항상 어둡게 생활 하였을 것이다. 해떨어지면 집에 가기 어려웠던 시대였던 것이다.

 

그림5. 신리 김진호가옥.

너와집의 창호는 널빤지로 되어 외부로부터 추위를 막아주었으며, 내부의 불빛이 바깥에 새어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또 다른 드라마 이야기를 하자. 필자는 건축사전공자이기도 하면서 인문학 또한 매우 좋아한다. 그래서 역사이야기를 다룬 사극을 종종 시청하는데, 드라마의 주된 배경은 주로 고려 말 조선초기의 조선개국이야기, 태종의 왕자의 난, 세종의 중도정치, 세조의 정권탈취와 단종복위운동사건, 인수대비와 연산군의 갈등에 따른 사화시대, 사림과 문정왕후의 훈구파 대립 등 조선왕조 초기의 수많은 갈등을 다룬 이야기들이다. 이들 이야기 중심에는 유학을 중심사상으로 사회개혁을 하려는 신진사대부와 사림, 그리고 불교를 지속적으로 믿었던 왕실과 훈구대신들의 대립이 그려진다. 드라마에는 항상 왕실이 기원을 하거나 고난이 있을 경우 사찰에 가서 대웅전 마루에 엎드려 부처님께 반복된 기도를 하는 장면이 나오곤 한다. 이 장면도 건축의 당시 시대상과 동떨어진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조선초기와 임진왜란 이전의 중기에는 대웅전 마루에서 절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웅전바닥에 마루가 깔리고, 그 위에서 절을 할 수 있게 된 때는 1620년대에 들어서 부터이다. 이전에는 대웅전 바닥에 전돌이라는 납작한 정사각형의 검은색으로 된, 흙을 구워 만든 건축재료로 깔고 석가모니의 불단을 건물 중심에 놓아 탑돌이를 하 듯 부처님을 돌면서 기도를 할 수 있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불방법이 신도들이 불전내부에 들어가 절을 하는 방법으로 변환되면서, 17세기부터는 불전바닥을 마루로 깔고, 부처님의 불단을 배면 방향으로 옮겨, 불단 앞의 공간을 넓게 확보하였기 때문이다. 물론 현재 불전바닥이 전돌로 된 사찰이 거의 없기 때문에 마루를 이용하여 절을 하는 장면이 연출되었다고 하지만, 이러한 방송에서의 왜곡된 건축모습은 우리건축을 이해하는 데에 올바른 영향을 줄 수 없다고 생각된다.

 

그림6. 수덕사 대웅전 마당.

고려시대 후기인 1308년에 창건된 수덕사 대웅전은 마당에 같은 시대의 삼층석탑이 세워져 있다.

조선중기 이전의 사찰에서는 대웅전 마당에 세워진 탑을 도는 의식이 야단법석과 함께 대표적인 불교의례였다.

이러한 의례를 요잡이라고 한다.



그림7. 부석사 무량수전 내부.

1376년 중창된 부석사 무량수전의 내부는 중앙에 동향을 하고 있는 아미타불상이 조성되어 있다.

신도들은 불교의례를 위해 불상을 도는 요잡례를 하였다.

당시 바닥에는 전돌이 깔려, 조선중기 이후에 조성된 현재의 좌식공간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진정한 우리건축이야기

필자는 우리건축을 이야기 하면서 진정성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하곤 한다. 그것은 필자가 건축역사학자이기도 하거니와 진정성이 결여된 역사는 반드시 왜곡된 건축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역사는 과거에 있었던 현상만을 알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는 과거로부터 이루어진 인류 사회의 변천과 흥망의 과정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으며, 이는 우리에게 과거에서 일어난 과정과 결과에 따른 교훈을 통하여 미래를 대비하게 한다. 이러한 과거와 미래의 연결은 현재에서의 진정성있는 역사의 분석과 이해를 통해서만이 이룰 수 있다.

 

앞에서 본 두 장면은 비록 별 문제가 되지 않는 모습 같이 보이지만, 건축은 그 시대의 사회와 문화를 반영하면서 발전하고 동시에 당시의 모습을 고스란히 미래에 전달하기에, 우리건축을 이해하고 활용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왜곡된 현상과 의미 전달은 결코 지나쳐서는 안 될 문제이다. 현대의 많은 건축가들은 우리전통의 건축을 바라보며, 보여 지고 있는 모습과 현상만을 그들의 작품 속에 담으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 건축에는 그 속에 수십 년, 아니 수백 년, 나아가 수천 년 동안 흘러온 우리 민족의 건축정신이 담겨져 있다. 그 속에는 역사가, 그 속에는 사상이, 그 속에는 기술이, 그 속에는 예술이, 또 그 속에는 삶이 녹아있다. 그렇기에 우리건축을 바라볼 때 보이는 것만 보지 않고, 그 속에 있는 수많은 정신들을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바로 그 능력을 가질 수 있게 하며, 우리건축을 보고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건축역사교육이다.

 

본고는 짧은 기간이지만, 진정성 있는 우리건축의 지나온 과정과 이야기들을 총 6편의 과정을 거쳐 여러분께 소개하고자 한다. 넓게는 한국건축사의 전 과정을 가볍게 훑어보는 계기가 될 것이며, 좁게는 전에 가볍게 넘겼고 왜곡된 우리건축의 모습을 각 주제별로 진정성 있게 접근하는 시간이 될 것을 기대한다. ANN

 

김상태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전통건축학과 교수

 

김상태 Sangtae Kim 필자는 현재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전통건축학과 교수(학과장)로 몸담았다. 홍익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를 받았다. 미국 UCLA International Institute, Center for Korean Studies에서 POST DOC.연구과정을 밟았다. 주요 논저로는 신라시대 가람의 구성 원리와 밀교적 상관관계 연구, 7ㆍ8세기 동아시아 2탑식가람의 생성과 전개에 관한 연구, 노인행태와 주거설계기법에 관한연구 외 다수가 있다. archiskim.com

 

연재 순서 _ Prologue : 나의 우리건축 이야기 | 궁궐과 도시이야기 | 불교건축이야기 | 유교건축이야기 | 주거건축이야기 | 그밖에, 우리건축과 현대건축이 나아가야 할 길

안정원 기자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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