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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태 교수의 우리건축 제대로 알기 05, 주거건축 이야기

Prof. Sang-tae Kim’s Learn our right architecture, 'A story of a residence architecture'

등록일 2021년03월08일 09시34분 URL복사 기사스크랩 프린트하기 이메일문의 쪽지신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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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태 교수의 우리건축 제대로 알기 05, 주거건축 이야기

 

"역사는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변한다.

그리고 역사가 쉼 없이 변하 듯, 우리건축도 따라서 변한다.

그것이 바로 건축의 역사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건축역사를 알아야 한다."

 

 

주거건축 이야기

얼마 전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주거지가 발견되었다는 기사가 났다. 1만 년 전 신석기인들이 지었다고 하는 원형 움집의 유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주거건축이 1만년이 넘는 역사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모든 건축 중, 주거건축은 그 역사가 가장 길기 때문에 모든 나라의 건축을 이해하려면 그 나라의 주거건축을 보면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주거는 원형의 움집으로 시작하여, 정방형의 청동기주거, 이엉을 얹은 초가집의 형태를 갖춘 철기시대의 주거, 그리고 기와를 얹은 기와집 등이 우리의 주거역사를 대표한다. 이번 연재의 5번째 주제인 주거건축 이야기에서는 시대적인 변화와 함께 사상, 경제 등 다각적인 접근을 통하여 우리 주거건축이 가지는 특성을 알아보고자 한다.

 

3칸의 미학, 세상을 담다

초가삼간(草家三間), 우리가 어려서부터 자주 들었던 말이다. 그 초가삼간의 정의는 초가로 된 3칸의 작은 집을 의미하는데, 비유로는 아주 보잘 것 없고 작은 집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역사 이전 시기인 선사시대 주거인 수형 주거(움집)는 사람이 사는 작은 집의 최소 단위인 1칸으로 되어 있고, 사람이 공간의 분화를 경험한 후 나타난 부엌과 방으로 구성된 보잘 것 없는 규모의 2칸 집이 분명 존재했다. 그런데 왜 굳이 3칸 집이라고 했을까? 초가집이야 선사시대부터 서민주택의 대명사요, 1960~70년대까지도 대부분 주택이 초가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보잘 것 없는 집의 표현을 인정한다지만, 3칸 집은 왜 가난하고 작은집의 대명사가 되었을까?

그것은 아마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조선시대의 일반 서민들의 집이 3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얼마 전 필자는 서천지역의 한산모시를 생업으로 종사하신 서민들의 주거지를 조사한 적이 있다. 현재는 대부분의 집이 현대식 벽돌(블럭), 혹은 콘크리트 식으로 다시 지었지만, 남아 있는 몇 십 채의 전통주택들은 초가집의 원형을 어느 정도 담고 있었다. 집의 규모는 3칸, 4칸, 혹은 5칸 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4칸과 5칸 집의 집주인과 인터뷰를 하면, 대부분 본래 3칸이었던 초가집을 최근 30~40년 전에 확장하여 살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역시 1970년대 까지도 우리나라의 서민, 농촌주택은 초가삼간이었던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여기서 또 궁금한 것은 왜 하필 3칸이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3칸으로 구성된 주거건축 공간에 대하여 잠시 알아보기로 하자. 조선 임금과 왕비의 주거공간이었던 경복궁 강녕전과 교태전, 창덕궁의 대조전을 보면, 전체 배치가 좌우대칭으로 길게 늘어서 있고 건물의 규모도 매우 커서, 여느 양반 사대부와 민가건축과 크게 구별된다. 그런데 서로 차별화된 건축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궁궐의 왕과 왕비의 주거공간인 침전과 사대부의 주택 안방을 서로 비교하면, 공통된 중심공간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3칸(三間)으로 구성된 대청마루이다.

 

 

그림 1. 경복궁 교태전 전경. 구중심처의 궁궐 중, 가장 중요한 공간인 왕비의 침전인 교태전의 모습이다.

교태전에서 행사나 제례를 행하지 않았음에도 3칸의 대청을 두었다.

모든 건축의 모범인 궁궐건축에서 유교적 예제의 상징적 공간을 연출하였다고 볼 수 있다.

 

조선시대 궁궐과 사대부집은 그들이 가진 유교적 사고관에 입각하여 그들의 건축공간을 구축하였는데, 이러한 유교적 건축관에 입각하여 주거건축 공간이 영향을 받은 것은 고려 말 중국 송나라에서 유입된 주자학(성리학)이었다. 주자, 즉 주희는 새로운 유교사상을 집대성한 학자로 성리학을 완성하였으며, 왕에서부터 사대부, 일반 민간에 이르기까지 보편화된 유교적 예법을 담은 주자가례(朱子家禮)를 편찬하여 조선시대 건축계획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주자가례는 관(冠)․혼(婚)․상(喪)․제(祭), 즉 사례(四禮)를 중심내용으로 한 예제로 주거건축인 정침에서 예제를 위한 공간에 대하여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주자가례에서는 조상의 위패를 모셔 놓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집안에 설치한 사당인 가묘(家廟)를 지어 조상에 대한 예를 다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가묘건축을 짓는 것은 많은 예산이 들어가는 작업이다. 조선 초기 먹고살기 바쁜 여느 사대부들도 가묘를 짓는 것은 큰맘을 먹어야지만 가능하였다. 하물며 일반 백성들은 꿈도 꾸지 못하였을 것이다. 조선 초기 유교를 신봉한 사대부들은 가묘를 만들기 전, 자신의 주거건축 중심공간인 정침(안방)의 중심에 3칸의 공간을 만들어 사례를 거행하였다. 3칸의 대청마루에서 자식은 관례를 치르고 성인이 되었으며, 그곳에서 혼례를 거행하여 어른으로 성장한 자식을 맞이하고, 부모님의 상을 치르는 공간도 대청마루였다. 조상에 대한 예를 다하기 위해 때마다 올리는 제사도 대청마루에서 시행하였다. 가족의 대소사 중 가장 중요한 행사를 바로 대청에서 치르게 된 것이다.

 

3칸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세상의 모든 것을 의미한다. 天․地․人, 바로 하늘과 땅과 사람의 수를 가리키는 것으로, 유교의 1차적 완성수이기도 하다. 유교경전인 4서3경중에서 하늘의 이치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 주역을 살펴보면, 세상의 완전체인 태극(☯)이 

양과 음을 낳고, 양과 음은 사상을, 사상은 팔괘를 낳는다고 하였다. 팔괘는 그 효가 3개로 되어 있어 천지인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바로 첫 번째 세상의 완성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3의 수는 유교의 세상을 의미하고 있다. 우리가 사는 건축물은 기단과 벽체와 지붕으로 이루어져 있다. 기단은 집을 지지하는 구조물로 지(地)를, 벽체는 사람이 사는 공간으로 인(人)으로, 그리고 지붕은 사람이 사는 공간을 감싸주고 막아주는 하늘인 천(天)을 의미한다. 집, 그자체가 세상이다. 거기에 집에서 가장 중심공간인 정침에 3칸 대청의 또 다른 세상을 두어, 세상 속 세상의 중심에서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사례를 거행하였던 것이다.

 

 

그림 2. 양동마을 관가정의 안채 전경. 보물442호인 관가정은 주거건축에서 선정되기 어려운 국보급 문화재로, 조선 초기인 16세기 주거건축의 모습을 고스란히 나타내고 있으며, 전형적인 좌우대칭의 3칸 대청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성리학의 대가인 김종직의 제자이며, 동방 18현으로 문묘에 배향된 우재 손중돈이 계획한 예제를 위한 건축임을 알 수 있다.

 

마을의 위계, 종법질서의 세계

 

14세기 후반, 불교가 국교였던 고려를 유교의 세상으로 만들고자 한 신진사대부가 왕의 성씨를 바꾸는 역성혁명을 일으켜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그 당시 사대부들은 한반도에서 천년이상을 사회적 · 정신적 중심역할을 하였던 불교를 대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추구하였던 유교사상을 모든 백성에게 강요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초기의 유교세계는 매우 탄력적이고, 융통성이 있게 적용되었다. 주거건축도 사회의 변화에 발맞추어 융통성 있게 발전하였다. 주변 지세와 어울리는 유기적인 배치와 엄격한 위계보다는 실용적인 공간의 구성, 그리고 절제와 풍류를 중시하는 유학자들의 건축세계를 표현한 간결하면서도 자연에 순응하는 건축 규모와 형태를 구축하였다. 바로 양동마을과 하회마을, 그리고 별서건축이 그러하였다.

 

그러나 17세기 조선 중기는 500년 역사를 가진 조선에 있어서 매우 힘든 시기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두 전쟁은 전국을 황폐화 시켰으며, 경제와 문화, 그리고 사회의 전반적인 분야에서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게 한 원인이 되었다. 특히 일반 서민층의 백성들은 두 양란의 책임을 양반의 기득권 세력의 문제로 인하여 발생하였다고 생각하였기에, 양반을 중심으로 한 신분체제를 변혁하고자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배경은 왕을 비롯한 집권층 세력이 백성에 대한 애민사상으로 통치를 하려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백성들을 유교적 위계질서의 틀에 넣어 더욱 경직화된 사회를 만들게 하였다. 한마디로 계엄을 선포한 것과 다름없는 사회를 만들었던 것이다. 전쟁의 책임을 자신들이 지지 않은 채 백성들을 더욱 고단하고 불평조차 하지 못하는 사회로 만들고자 노력을 한 것이다. 이때부터 나온 위계질서에 관한 것을 살펴보면, 여필종부, 삼부종사, 남녀칠세부동석, 장자세습 등의 위계를 강조하는 사회로 변화가 되었고, 유학자들은 조선을 도운 명나라에 대한 맹목적인 사대와 예학만을 강조하는 예의의 시대를 만들고자 노력하였다. 사람들의 다양성을 인정하기 보다는 최상위 계층에서 최하위 계층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일직선으로 늘어선 획일화된 사회를 만들었다.

 

건축에 있어서도 똑같은 모습의 경향을 보였다. 특히 마을의 경우에는 종가의 위계가 매우 커지는 모습을 보이는 동시에, 마을 배치 또한 종가를 중심으로 유교적 사고관에 입각하여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마을을 구성함에 있어, 마을의 제일 상부에 종가댁이 입지하고, 첫째아들은 동남쪽으로 배치하며, 차남은 서남쪽으로, 삼남은 그보다 아래쪽으로 자리를 잡게 하였다. 종가가 마을의 모든 결정권을 행사하는 무소불위의 막대한 권력의 중심이 되어, 종법질서가 모든 것의 중심이 된 세계가 도래한 것이다. 유교적 절대주의가 발전하면서 주자가례에 의한 가묘설치가 유행하였는데, 사당건립이 주택계획에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마을의 북동쪽에는 마을 시조의 사당이 건립되어 마을의 모든 구성원이 매일 자연스럽게 쳐다보며 배향하는 모습을 연출하게 하였다. 조선 초기의 유연하고 실용적이면서도 유교가 가지는 절제와 검소의 모습을 갖춘 건축의 경향은, 점차 경직되고 과장되며 자기중심적인 종법질서가 강조된 귀족건축으로 변화되었던 것이다.

 

 

그림 3. 논산 윤증선생 고택 전경. 명재 윤증선생고택은 조선 후기인 19세기를 대표하는 양반주택이다.

위엄이 넘치고 풍채가 당당한 사랑채와 동북면에 엄숙한 사당의 모습이 보인다. 이 집을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당을 보면서 접근해야 한다.

 

 

사랑채와 안채, 그 경계를 넘자

 

필자가 한국건축사를 강의할 때, 항상 학생들에게 물어보는 여러 질문 중에 하나가 있다. “주거건축인 살림집에서 가장 중심의 역할을 하는 건물은 무엇일까? 사랑채 아니면 안채” 이 질문에 대부분의 많은 학생들은 사랑채라고 대답한다. 집안의 바깥일을 맡는 남자들이 기거하며 생활하는 공간이면서, 동시에 손님을 맞이하는 공간인 사랑채가 주거건축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현대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의 가족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는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조선 초기의 사랑채는 안채였던 정침의 한 모서리에 살짝 붙어있는 방 한두 칸의 공간일 뿐이었다.

 

 

그림 4. 양동마을 서백당과 사랑의 모습.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살림집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서백당(1454년 성종15)은 초기 사랑공간의 모습을 매우 잘 보여주고 있다.

안채 한 모퉁이에 겨우 3칸을 얻어 대문에서 들어오는 손님들을 맞이하는 바깥사람의 모습이 절로 그려진다.

이렇듯 조선 초기의 사랑은 주거건축의 중심적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조선후기 숙종과 영조, 그리고 정조에 이르는 조선의 마지막 황금기가 지나갈 무렵, 건축의 세계는 조선중기와 다른 모습으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양란이후 경직화된 유교의 세계는 점차 백성으로부터 외면당하기 시작하였으며, 광작농민과 도시상인이 양반에 대응하는 큰 세력으로 등장하면서 주거건축의 모습도 점차 경제력 위주의 화려하고 규모가 큰 건축과 남성의 사랑채 중심으로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사실 필자는 강의하면서 이 시기를 ‘돈의 세상’이라고 정의하여 불렀는데,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돈을 바라보고, 돈을 향해 달려갔으며, 돈이면 뭐든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조선 초기 백성들이 존경하고 흠모했던 유교 성현들은 어디에 간 것일까? 이 당시의 유학자들은 온통 실용적이고 중국유학파들로 일색이었다. 서로 소속되어 있는 당을 위해 모든 할 수 있는 학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지금의 정치인과 그 정치인들을 쫒는 폴리페서의 모습들이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역사는 역시 돌고 도는 것은 만고의 진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림 5. 구례 운조루 사랑채. 영조 52년인 1776년에 지어진 구례 운조루, 최고의 풍수지에 지어진 까닭에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이다.

조선후기 양반주택답게 사랑채가 매우 발달한 것을 볼 수 있다. 사랑채의 규모와 구조가 안채를 능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조선 후기 주거공간이 점차 사랑채의 위계가 높아지면서, 조선 초기 중심공간의 의미를 담은 정침의 명칭이 안채로 변하였다. 정침일 때와 안채일 때의 차이가 무엇일까? 정침일 때는 그 공간에서 인간 삶의 모든 시간을 담았음을 알 수 있다. 자손을 낳아 대를 잇는 생산(生産)의 공간이 바로 정침이며, 남녀가 처음 만나 결혼하여 어른이 된 공간이었으며, 집주인의 이 세상과의 가슴 아픈 이별을 고했던 공간이고, 언제나 자신들을 보호한다고 생각했던 조상에 진심어린 예를 올렸던 바로 그 공간이 정침이었던 것이다. 단순이 집주인 부부가 머물렀고 잠을 청했던 장소만이 아닌, 집이 가지고 있던 모든 속성이 정침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 가정의 중심이 남성주의, 가장주의, 종손주의로 옮겨가면서 바깥의 공간이 중요시 하게 되었다. 바로 바깥채인 사랑채의 기능이 강화되면서, 반대로 안쪽의 공간인 정침의 기능이 약화되었던 것이다. 그저 안쪽의 공간이라고 안채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정침과 사랑채였던 관계가 안채와 사랑채로 바뀌게 된 것이다. 더욱이 정침에서 행했던 제사의 기능이 사당으로 바뀌면서, 안채는 생산의 기능만을 가지게 되는 정말 안에서만 가능한 공간으로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경제 중심의 사회구조와 남성위계의 확대로 인하여 사랑채는 점차 규모가 커지고, 다양한 형태의 평면을 구성하게 되었으며, 나아가 장식 또한 화려하게 치장하게 되었다. 드디어 남성의 공간이 여성의 공간으로부터 빠져나와 독자적인 공간을 형성하고, 나아가 오히려 안채를 위압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알았던 주거공간의 중심을 차지하게 된 사랑채의 본질이다. 마치 모든 전통건축에서 나타난 현상이라고 생각했던 사랑채의 중심적 본질은 단지 300년 정도의 시간 전에 일어난 사건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역사는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변한다. 그리고 역사가 쉼 없이 변하 듯, 우리건축도 따라서 변한다. 그것이 바로 건축의 역사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건축역사를 알아야 한다.

 

 

그림 6. 강릉 선교장의 열화당. 우리나라 3대 전통주택으로 손꼽히는 선교장,

열화당은 선교장의 사랑채로 순조15년인 1815년에 지어졌다.

사랑채의 지속적인 발달을 넘어, 차양까지 달아 기능과 의장의 발전까지 보여주는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주택풍수, 양택론을 말한다

 

대학 2학년 1학기 시절, 다른 여러 대학과 마찬가지로 필자가 다녔던 모교에서는 주택을 주제로 설계수업을 진행하였다. 1, 2주에 걸친 대지분석, 개념설정, 배치도 작성, 평면도 작성, 단면도와 입면도를 그리면서 내가 나중에 설계할 집을 상상하며 설계를 진행하였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 배치도를 그리면서 필자를 비롯한 대부분의 학생들은 一자 형태의 집을 설계하면서 대부분이 남향을 하게 하였고, 연못을 만들었으며, 대문은 집과 일직선으로 정남향으로 배치했다. 아무런 건축적 배경 없이, 각론 책에 나온 그대로의 내용으로, 집은 다 그랬던 것으로 생각하여 기계적 디자인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3학년 전통건축을 접하면서 우리건축의 모습은 다르다는 것을 처음 접하였다.

 

조선후기, 정치는 정치대로 자신들의 붕당을 위해 편 가르기를 하고, 광작농민들과 상인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욕심을 챙기고, 백성들은 더욱더 가난하고 힘든 생활고에 빠지는 시기였다. 믿는 것은 오직 돈뿐인 세상. 돈을 많이 번 사람들은 권력을 탐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들이 축적한 부를 자신의 집에 투자하기 시작하였으며, 더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집, 귀하게 되는 집, 장수하는 집 등을 찾게 되었다. 집터를 잡는 데 적용되었던 풍수사상이 집의 배치를 결정하는 양택론으로 발전하여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양택론은 중국에서 발달한 것으로 정확히 언제 만들어 졌는지도 확실치 않다. 그러나 양택론은 아시아의 주택풍수의 중심에 서있으며, 현재도 많은 학자들이 양택론에 대하여 연구하고 관심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가 양택론이 발달하게 된 것은 조선후기이다. 그 이전의 주택의 배치를 보면, 양택론의 영향을 받은 모습이 많이 보이고 있지만, 문헌에 의해 뚜렷하게 유행하였다고 표현된 것은 산림경제가 가장 빠르기 때문에 산림경제를 편찬한 홍만선이 활동하였던 시기인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반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산림경제는 백과사전으로 곡식의 경작법, 나무와 과실수의 육성법, 가축을 기르는 방법, 건강과 구급에 관한 사항, 식품가공 및 저장법, 도구를 손질하는 방법 등 이전에 유행하였던 실생활에 필요한 유익한 여러 사항을 언급하고 있다. 특히 복거에서는 양택론에 의한 주택의 배치와 건축보수법, 건축과 관련된 여러 시설, 그리고 조경에 대한 내용을 열거하고 있다. 이미 백과사전에 양택론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이미 양택론이 유행하고 있으며, 집을 새로 짓거나 보수할 때 편리하게 적용하도록 유도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양택론에서는 크게 집의 중요 요소와 집의 유형에 따라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집의 중요 요소인 삼요(三要)는 정침(正寢), 대문(門), 부엌(竈)을 의미한다. 정침인 안채와 대문과 부엌의 위치로 좋은 집과 나쁜 집을 분별한다고 하였다. 집의 유형은 두 가지인데, 동사택(東舍宅)과 서사택(西舍宅)이다. 동사택은 주택의 삼요가 동쪽의 영역에 위치하고 있어야 하며, 서사택은 삼요가 서쪽의 영역에 위치하고 있어야 한다. 방위를 8개로 나누어 보면, 동사택은 북(北)·동(東)·동남(東南)·남(南) 방위의 영역이며, 서사택은 서(西)·서남(西南)·서북(西北)·동북(東北) 방위의 영역이다. 즉 동사택의 집을 지으려면, 북(北)·동(東)·동남(東南)·남(南) 방위에 정침과 대문, 그리고 부엌이 배치되어야 한다. 서사택도 서(西)·서남(西南)·서북(西北)·동북(東北) 방위에 삼요가 배치되어야 한다. 만약 삼요 중 하나의 요소라도 다른 방위에 포함이 된다면, 양택론에서는 그 집이 화가 미치는 집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각각의 동사택, 또는 서사택내에서 삼요가 아무렇게나 배치해서는 문제가 발생한다. 각 방위마다 음양, 오행, 상생의 조건이 다르기 때문이다.

 

동사택 중 하나의 예를 보자, 우리가 가장 많이 애용하고 있는 남향집을 보면, 우선 정침을 北에 두고 남향을 하게 한다. 그리고 대문의 위치를 찾아야 하는데, 東, 東南, 南의 방위로만 정할 수 있다. 그런데 北은 양(+)의 방위이면서 물(水)을 의미하는 방위이기도 하다. 우선 北이 양을 의미하므로 음양의 조화를 위해 음의 방위를 찾아야 한다. 음의 방위는 東南과 南의 방위이다. 東의 방위는 양의 수로 양과 양이 만나면 서로 밀어내는 현상이 발생한다. 東南과 南의 오행을 찾아보면, 東南은 나무(木)이고 南은 불(火)을 의미하고 있다. 정침의 방위인 北이 물을 의미하므로, 오행 중 상생요소인 나무를 상징하는 위치인 東南의 방위가 최고의 좋은 자리임을 알 수 있다. 불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南의 방위는 그리 좋지 않는 방위의 선택이다. 그 이유는 물과 불이 서로 상극(相剋)이기 때문이다. 물의 기운이 불을 끄기 때문이며, 물(北)은 남자를 의미하고, 불(南)은 여자를 의미하기 때문에 남자의 기운이 여자를 다치게 한다고 한다. 양택론에서는 정침이 북에 있어 남향을 하고, 정남 방향에 대문을 놓는 다면, 집안의 여자가 좋지 않은 일들이 생긴다고 서술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부엌은 정침의 같은 사택방위에 붙여 놓으면 된다.

 

 

그림 7. 양택론 패철. 동사택과 서사택을 구별하여 집의 좌향을 보는 패철.

일반적으로 패철은 음택(묘자리)과 양택(집자리)을 보두 볼 수 있게 제작하였는데,

위와 같이 건축(양택)만을 위한 패철도 제작되어 많은 사람들이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주역의 음양오행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 양택론은 집의 길흉화복을 집의 중요 요소인 정침과 대문, 그리고 부엌의 위치로 결정하고 있다. 양택론은 특히 시대가 어지러울 때 유행하였다. 조선 후기와 일제강점기 때 그러하였다. 미래가 불투명하기 때문에 좋은 집을 지어 자신의 미래와 운을 맡기고자 한 것이다.

 

 

그림 8. 전라구례오미동가도와 운조루의 계좌정향(癸坐,丁向) 좌향도. 구례 운조루는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풍수 명당지이다.

많은 사람들은 운조루가 단지 좋은 명당에 입지하였다는 것만을 알고 있는데,

사실 운조루는 양택론에 입각하여 보면 서사택의 생기택(生氣宅)으로 “전답과 재산이 날로 늘어나고,

여섯 가축이 흥왕하며, 자손이 만당”한다는 매우 길한 해석을 가진 길택(吉宅)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필자가 양택론에 대한 강의를 할 때면 많은 수강생이 큰 관심을 가지고 청강을 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집 또한 양택론을 적용하려고 노력한다. 그럴 때면 필자는 양택론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곤 한다. 좋은 장소를 가지고 좋은 집을 지었더라도 그 속에 사는 사람이 좋지 않은 삶을 살면 그 집은 흉가로 변하고, 아무리 좋지 않은 흉가에서 살더라도 남에게 사랑을 베풀고 좋은 일을 하고 산다면 그 흉가가 길지의 명당이 된다는 옛 선현들의 명언을 이야기 해준다. ANN 

김상태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전통건축학과 교수

 

 

김상태 Sangtae Kim 필자는 현재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전통건축학과 교수(학과장)로 몸담고 있다. 홍익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를 받았다. 미국 UCLA International Institute, Center for Korean Studies에서 POST DOC.연구과정을 밟았다. 주요 논저로는 신라시대 가람의 구성 원리와 밀교적 상관관계 연구, 7ㆍ8세기 동아시아 2탑식가람의 생성과 전개에 관한 연구, 노인행태와 주거설계기법에 관한연구 외 다수가 있다. archisk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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